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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난지에서도 명나라와의 외교를 성사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조정의 행정과 군사적 대응에도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 했어요. 정탁은 외교적 감각도 뛰어나서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고 외교문서를 다루는 데에 있어도 문장과 절도가 탁월하여 동료 관리들의 존경을 받았어요. 전쟁 중 왜적에게 항복하였던 이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관용을 베풀며 인륜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조선사회의 회복에 큰 기여를 했어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국정의 안정을 위한 제도 정비와 인재 등용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학 양성과 사대부 정신의 복원에도 관심을 기울였어요. 정탁은 노년에 이르러 영의정에 올랐고, 이후 병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어요. 그는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인품은 당시뿐 아니라 후대에도 본받을 만한 인물로 평가 되었어요. 특히 사관들은 그를 가리켜 겸손하면서도 엄정하고, 충직하면서도 따뜻한 인물 이라 전하며, 조선 중기 정치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한 인물로 기억 했어요. 그의 유언 중에는 “국가의 기강은 도리에서 나오는데 도리는 사람됨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전해지며 그의 정치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해요. 정탁의 문집은 전하지 않으나, 그의 상소문과 교지 등 일부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 에 남아 있는데 당시 그의 활동은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 정치사를 이해 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 돼요.